경주는 매년 식목일 전후가 벚꽃이 최고 절정이다. 엄청난 인파가 낮에도 밤에도 벚꽃을 보겠다고 경주를 찾는다. 특히나 보문단지 순환도로의 벚꽃이 화려하고, 밤에도 조명을 멋있게 연출해놓아서 전국적으로 꼽힐 만하다. 경주에 새로 조성되는 길마다 벚꽃을 많이 심어서 이제는 어디를 가도 이 시즌에는 온통 벚꽃 천지다. 경주 사는 사람들은 터미널 앞 강 건너편의 김유신 장군묘 앞의 벚꽃길을 즐겨 찾는다. 보문단지보다는 접근성이 좋기도 하고, 인도가 확보가 되어 있어 덜 위험한 때문이기도 하다.
작년에는 벚꽃이 좀 늦었는데, 그래도 지인들이 두어번 다녀가는 바람에 끌려나가 밤벚꽃을 보고 왔다. 올해는 적당한 시기에 피고 있어 강 건너편에서 꽃이 하얗게 버는 것을 며칠 쳐다보다가 날을 잡아서 오전 산책을 다녀왔다. 터미널 앞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를 사서 보틀에 담고, 느릿느릿 다리를 건넜다. 중간 중간 서서 벚꽃길 전체를 사진에 담아보려고 이렇게 저렇게 구도를 잡아보았으나, 신통치 않다. 고수부지에는 할배 한 사람이 섀도우 복싱을 하며 운동 삼매경이다. 다리를 건너오는 한 무리의 젊은 외국인들, 그 뒤로 의경들도 꽃놀이를 나왔다 가는지 일개 소대 규모의 인원이 웃으며 걸어온다. 다리 지나자마자 오른편으로 꽃길이다. 이미 연인들이나 친구 혹은 가족 단위로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다. 차가 지나가고 나면 찻길 가운데로 들어가 한껏 분위기를 낸다. 나는 작년에 큰 맘 먹고 장만한 아이폰 13 pro의 카메라 기능을 최대한 활용해서 꽃을 찍었다.
이렇게 일주일 정도 화사하게 피었다가, 며칠 후에 바람이 불면 이 길에는 환상적인 꽃비가 날릴 것이다. 벚꽃 중에 벚꽃은 그 꽃비로 떨어지는 벚꽃이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아름다움이 극에 달한 그 순간에 찬란하게 허공에 몸을 떨구는 아찔한 추락, 엄연한 비극인데도 그 순간 누구나 눈이 멀고, 목이 멘다.
일본에서, 특히 사무라이들이 그 사쿠라의 극적인 소멸에 미학적 의미를 얹은 것은 잘 알려진 바다. 삶보다 죽음에서, 그 소멸의 순간이 가장 아름답게 기억되기를 바라는 것은 허무주의적 냄새를 훅 풍기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다. 구차함을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생을 마무리하는 것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더 진지하게 고려해보게된다. 평생을 주름 없이 깨끗하고 깔끔하게 잘 살아왔다면야 죽는 마당에 약간의 폐를 끼친다고 큰 흠이 되지는 않겠으나, 이미 건강이 기울고, 삶에 윤기를 잃었고, 누군가의 노동과 인내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상황으로 접어들고 있다면 저 사무라이 식의 깔끔한 뒷처리, 혹은 끝까지 도도하게 자기 존엄을 유지하려는 꼿꼿함이 부러워지는 건 어쩔 수가 없지 싶다. 친일이든 왜색이든 나는 잘 모르겠고, 사무라이들 덕에 매년 봄마다 벚꽃을 볼 때면 인생이 피어오를 때보다 질 때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삼 년전 식목일에 아버지가 세상을 뜨셨다. 매우 급작스런 일이었는데, 지나고 보니 심근경색이었구나 싶었지만, 그때 경주집을 방문하던 남동생은 급체인 줄로 알았다가 하루만에 세상이 무너지는 일을 겪었다. 나도 대학병원 응급실로 이송한다는 난데 없는 전화를 오후 서너 시쯤 받고, 바로 서울역으로 달려가 표도 끊지 못하고 급하게 기차에 올라타서 역무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티켓팅을 한 직후에 사망하셨다는 전화를 받고 객차 사이에 머리가 하얘진 채로 앉아서 왔던 기억이 있다. 응급실이 아니라 장례식장으로 들어가는데, 눈물도 나지 않았고 이제부터 해야 할 장례식장의 온갖 절차가 머리 속에서 미친듯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장지를 결정해야 하고, 조문객들 음식을 주문해야 하고, 수의를 뭘로 할지 정해주고, 발인시간에 맞춰 화장터를 예약하고, 온갖 물품들의 인수증에 싸인을 해야 했다. 조의금을 누가 받고, 어떻게 관리할지 정해주어야 했다. 누구에게 어떻게 연락해야 하는지, 가족친지들과 아버지의 친구분들과 공적으로 알려야 할 곳을 챙겨야 했고, 나도 회사와 주변에 알려야 했다. 그렇게 동문회와 교회와 온갖 연락망을 가동했다. 장례식에 갈 때마다 이것은 죽은 자를 기억하기 위한 의례가 아니라 산 자들의 망각을 위한 분주한 절차란 생각을 해왔는데, 나도 결국 한 치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시간을 겪었다.
멀리서 와준 친구들과 고마운 지인들이 있었다. 나라면 그렇게 시간을 내지 못할 처지에 있는 이들이 깜짝 깜짝 찾아와 주었다. 초상집의 국과 밥을 먹이고는 잠시 근처 김유신 장군묘 앞 길에 들러 벚꽃을 보고 가라고 말해주었다. 슬픔을 위로하러 왔으나, 잠시 그들의 마음이 밝아졌으면 좋겠다 싶었다. 며칠간의 씨름을 견디는 것은 할 만 했다.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찾아온 조문객을 정성스레 맞이하는 것, 행정적인 절차를 빨리 빨리 결정해주고 진척 시키는 것, 입관과 발인 예배를 고향 모교회에 새로 오신 목사님께 부탁을 드리는 것, 부조금에서 필요한 경비를 제 때 지불하는 것, 현금 사고 나지 않도록 틈틈이 은행에 부조금을 입금하는 것,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 집안의 먼 친척이 와서 괜히 술 먹고 행패 부리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 그런 것을 삼 일간 잘 했다. 몇번 크게 울었지만 나는 매우 침착했고, 마음은 이상하게 담담했다. 뒤돌아보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급히 돌아가시는 바람에 병원이며, 상황대처에 불만스런 부분이 없을 수 없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고 되돌이킬 수 없는 일은 흘려보내기로 했다. 역시 장례는 남은 자들을 위한 행사였기 때문이었을 거다. 비극을 굳이 비극이라고 너댓번씩 재확인하고 싶지 않았고, 우리는 이걸 잘 견뎌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이유 없이 중요했다.
장례식 기간 중에 크게 눈물이 터진 것은 아버지 친구들 중 가장 가까운 분들이 오셨을 때였다. 친구 좋아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아버지셨는데, 그중 한 분이 들어오며 큰 소리로 일갈 하셨다. “벽력같이 왔다가, 벽력같이 가는구나. 느그 아부지 답다!” 늘 ROTC 1기 출신으로 임관해서 전방부대 소대장으로 날아다녔던 이야기를 신나게 하시던 아버지가 떠올라 눈물이 주체 못하게 터져버렸다. 장례식 내내 가장 공공연히 망자를 기억하게 해준 한마디였다. 내 아버지의 어떠함과 그가 오고 떠나감을 저렇게 씩씩하게 단언하며 기려주었던 그 말이 삼 년 전 장례식장의 최고의 기억이고, 위로였다.
한 주간을 더 지내며 뒷정리를 했다.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남길 것을 골랐다. 그러면서 생전에 아버지와 같이 다녔던 식당을 한번씩 가보았다. 내가 고향에 오면 아버지는 일부러 자신이 좋아하던 식당에 가서 평소보다 거하게 식사를 하셨다. 가끔씩 개고기를 드셨는데, 나 혼자 그 집에 가서 앉아 밥을 한 그릇 먹었다. 탕을 한 숫갈 뜨는데, 갑자기 이 음식을 같이 먹을 사람이 이제는 세상에 없구나하는 생각이 휘몰아쳐서 딴 사람들 모르게 한참을 억억거렸다. 장례식보다 그 후에 빈 집이 더 슬프다던 얘기처럼 나는 볼썽사납게 식당에서 음식 맛을 보다 난데없이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돌발하는 바람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후로도 두어번 불현듯 울컥하는 상황을 만났었다. 품격이나 마음의 준비 따위 없이 감정이 치솟는 경험은 난데 없지만, 내가 아버지를 기억하는 방식이 상념 속에서가 아니라 냄새나 맛 같이 몸에 배인 어떤 것에서 촉발된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나같은 인간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몸에 스며든 기억이 통제되지 않고 튀어나오는 것을 겪을 때는 정말 감정의 무장해제를 당하는 느낌이다.
‘벚꽃 엔딩’은 널리 사랑받는 흥겨운 노래이지만 웬지 ‘벚꽃’이 아니라 ‘엔딩’에 방점이 찍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이까지 나를 이끌었다. 올해는 김유신 장군묘 앞 길의 벚꽃이 훨씬 단단하게 많이 피었다. 조만간 벚꽃이 다 꽃비로 날려 떨어지는 날에 나는 그 길을 혼자 걸으며 생의 찬란함과 더불어 간명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곱씹어 볼 것이다. 꽃이 피는 봄날에는 그 너머를 미리 보아둠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