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리
경주로 내려와 산 지가 이제 만 4년이 다 되어간다. 돌아보니 매년 다른 일을 했다. 벤쳐 회사의 교육과 홍보일을 재택으로 일 년쯤 했고, 좀 쉬다가 대구에서 도시재생 분야 일을 10개월간 했다. 그러고, 다시 좀 쉬다가 직접 내 일을 해보겠다고 해서 벌인 일이 ‘쪽샘살롱’이란 와인바다. 그간 재열투어란 여행 동아리를 따라 국내 여행을 다니며 재미있게 인생을 꾸려가고 있는 전국의 은둔 고수와 공간들을 꽤 많이 접하게 되었다. 내가 경주 출신이고 경주에 살고 있다고 하니, 경주 여행코스나 숙식을 추천 해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그렇게 손님치레를 수십 차례 했고, 그 과정에서 나도 경주를 다시 알아가야 할 필요를 많이 느꼈다. 지인들의 방문이 그 정도 되면 아지트를 하나 만들어 두면 재미있는 일을 벌여볼 여지가 있겠다 싶어 지인과 친구들의 부추김과 펀딩에 힘입어 2022년 10월에 열게된 것이 ‘쪽샘살롱’이다.
쪽샘살롱은 1970년대부터 24시간 해장국거리로 유명했던 팔우정 근처 쪽샘고분지구에 있다. 고분을 직관할 수 있는 위치인데다, 남쪽으로는 멀리 첨성대 너머 경주 남산을, 서쪽으로는 저녁마다 노을이 멋진 선도산 실루엣을 볼 수 있는 자리라 고민없이 냉큼 판을 벌였다. 돈도 없고, 경험도 없었던 터라, 거의 일 년간 수업료를 열심히 지불하며 도를 닦고 있다. 아마 전국에 중년 아저씨들이 운영하는 비슷한 운명에 처한 공간들이 많을텐데,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2022년 봄에 3개월간의 글쓰기 구독서비스를 시도했다. 매주 2편의 글을 유료구독자에게 이메일로 발송하는 방식인데, 몇 년간 책도 읽지 못하고, 글도 쓰지 못하고 황량하게 지내던 내 상황에서는 꽤나 긴장하며 시도한 일이었다. 총 24회의 연재를 무사히 마치고 나서 돌아보니, 그 글쓰기를 통해 내가 깨우친 교훈이 몇 가지 있었다. 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내면을 탐색하고자 했던 몇 편의 글은 아직 내가 만나야 할 질문들이 더 있다는 것과 이 문제는 지혜와 용기를 갖고 더 나아가야 본격적으로 다룰 수 있을 것이란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건드리지도 못한 몇가지 주제들은 준비시간이 더 필요한 주제이므로 함부로 욕심을 내지 말자는 결론에도 쉽게 동의가 되었다. 가장 큰 수확은 내가 경주라는 공간과 그 위에 축적된 시간을 탐색하는 일을 매우 흥미로워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일이었다. 적어도 내가 앞으로 상당 기간 탐구해 들어갈 대상을 발견했다는 것은 분명했다.
작년 봄에 썼던 연재글과 그 이후에 추가한 몇 편의 글을 모아서 2022년 10월에 <낭만 경주>란 단행본을 출간했다. 1인 출판사를 하나 만들어서 글 쓰고, 디자인 하고, 책 만들고, 유통하는 일까지 다 감당하느라 동분서주 했지만, 경주를 파고들어가는 작업으로서는 좋은 시작이었다고 자평한다. 오래된 유적들 앞에 서서 생기없는 연대표만 되뇌이는 식으로 경주 여행을 하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경주에서 살았던 과거의 인물들과 경주를 여행하는 오늘의 사람들을 겹쳐서 생각해 보도록 여러 모양으로 제안해 보았다. 대단한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아니지만, 의외의 방향에서 책을 높이 평가해 준 이들이 있어서 큰 힘이 되었다. 이왕 시작한 작업을 경주 지역학으로 발전시켜 깊이를 더해 보라는 주문도 있었고, 영문판으로 발간해보자며 번역 가능성을 타진해준 지인도 있었다. 경주를 소개하는 책은 그간 관광안내서 등 실용서적 류가 대부분이었고, 인문학적으로 업그레이드 된 몇 권이 나와 있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그 반대편에는 역사학, 고고학, 종교 분야의 학술 서적과 논문들이 있는데, 분량도 상당하거니와 매우 전문적 내용이어서 거기서 제기되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들이 대중들에게 원활하게 전달되고 있지는 못하다. 나는 경주의 고색창연한 문화유산이 뻔하고 시시한 이야기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거침없이 불러내고 상상력을 자유자재로 발휘해서 폭발력을 응축하는 것을 보고 싶다. 대체 무얼 뇌관으로 써야 이 잠재력이 핵융합을 시작할 것인지 궁리를 해보는 일이 요즘의 내 고민이다.
2. 부족
나는 오랫동안 내가 개인주의자(individualist)라고 생각해왔다. 전체주의(totalitarianism) 혹은 집단주의(collectivism)가 매우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내가 오랫동안 몸 담았던 개신교계는 ‘공동체(community)’에 대해 관심이 많다. 나는 매번 그 논의가 마뜩치 않았는데, 공동체란 용어를 동원해서 결국은 집단주의를 강화시키는 용도로 써먹는 결과를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굳혀진 내 소신은 ‘개인주의를 통과하지 않은 공동체 논의는 결국 집단주의 강화로 귀결된다’는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개인이 익명의 구성원이 아니라, 각자 이름을 갖고, 고유한 특성이 있는 존재로 존중되지 않는 곳에 공동체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왔다. 나는 그런 물음을 갖고 한편으로는 교회공동체를 들여다 보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와 정치 체제를 평가하고 있었다. 나는 ‘공동체’를 교회주의자들과 좌우 진영주의자들의 오남용과 왜곡으로부터 구원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우리 모두가 인정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내가 전적으로 개인주의자를 자처할 수 있었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개인주의 = 이기주의’를 넘어서지 못하는 한, 상대가 나에 대해 관심이 없는데 내가 상대를 배려한다거나, 챙겨야 하는 현실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일정한 수준의 상호주의는 불가피하다. 나는 독립성(independence)이 중요하지만,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야 말로 세상을 지탱하는 비밀이라고 생각한다. 각자 자신의 고유성을 지키며 살아도 괜찮은 사회이되 상호 불간섭주의로 끝나지 않고, 서로의 안녕과 행복을 지켜주는 느슨하되 믿음직한 연결 상태. 나는 우리가 이상적으로 그려볼 공동체라면 그런 모습일 것이라 확신한다. 그것이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이 만나는 바람직한 모습일 것이다.
공동체를 강령과 지도자와 경계선으로 상상하는 한, 집단과 체제를 만들고 운영하는 문제로 이해하는 한, 고전적인 집단주의의 폐해를 벗어나기 힘들다. 강령은 언제나 금기와 경계를 설정하고, 이에 따른 포상과 처벌로 운영되는 체제를 상정한다. 지도자란 존재는 그가 무능하면 체제의 성능을 떨어뜨리고, 유능하면 체제를 압도하거나 전횡하게 된다. 나는 공동체에 진심인 사람들조차 결국은 이런 쳇바퀴 도는 현실에 지치고 소진되어서, 선택지 바깥의 가능성을 상상조차 못하는 것을 반복적으로 보고 있다. 개인주의자들은 공동체를 구상하는 것을 공리주의적 기브 앤 테이크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산기에서 마이너스가 나는 것을 참지 못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덧셈뺄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곱셉과 나눗셈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공동체는 몇가지 기술적 문제만 해결하면 절로 풀리는 주제가 아니라, 매우 난이도 높고 섬세한 접근법이 필요한 인류 최대의 난제 중 하나이다. 연애든, 가족이든, 사회든, 국가든, 우리 삶의 모든 수준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모두 이와 관련되어 있다.
내가 공동체의 가능성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발견하였던 파편 같은 순간들은, 길거리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참여했지만 깊은 일체감을 느꼈던 어떤 예배의 순간들, 음악이나 미술을 향유하는 공통의 공간에서 즉각적으로 느꼈던 알 수 없는 연대의 감정, 짧은 순간이지만 함께 겪은 사건을 향한 환호나 탄식 속에서 즉각적으로 만들어지는 호의와 배려의 경험 같은 것들이다. 물론 이런 체험은 공동체 경험이라기 보다는 예술적 감동이라든지 종교적 경험이라는 다른 카테고리로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어떤 공동체도 그 기원을 담고 있는 원형적 사건에 대한 이야기(narrative)를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없고, 그 서사는 대부분 공통의 사건과 경험한 바에 대한 집단 기억의 형태로 공유되고, 전승된다.
개인이 자신이 거대한 전체의 한 부분이란 사실에 압도되고, 여기서 큰 감동을 경험하는 사건은 역사적으로 대중을 선동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잘 쓰여왔다. 독재자와 폭군들이 거대한 행사를 연출하고, 전율스런 집단 감정을 부추기는데 능한 것은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런 사건 속에서 느끼는 소속감과 연대감이 개인의 자의식을 소멸시키거나,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고양시키고 각성시키는 차원이 있다면 그것은 집단주의와는 다른 방향을 지시하는 체험이 될 수 있다. 어떤 감정은 평생 흔적을 남긴다. 찰나와 영원은 상반된 카테고리이지만, 그것은 물리적 시간의 지속 측면에서만 그렇고, 영향력의 차원에서는 찰나가 곧 영원을 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공동체를 논할 때, 나는 강령, 구조, 지도자 등을 따지는 방식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지는 ‘사건’의 차원을 분명히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미셸 마페졸리는 <부족의 시대: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개인주의의 쇠퇴>(문학동네, 2017)에서 전작 <디오니소스의 그림자>에서 옹호했던 입장을 다시 개진한다. 근대사회를 장악했던 생산성, 효율성, 합리성 등의 가치에 반하는 집단적 광란, 폭력, 성적 방탕 등이 포스트모던 사회의 추동력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 세상을 하나의 원리나 이데올로기로 해석하고 통제하려는 근대 사회를 작동시키는 주체는 국가나 개인 등의 단위가 아니라, 다원화된 시대에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새로운 단위, ‘부족(tribe)’이라고 부를 만한 이들, 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주목하는 지점은, 고전적인 정치사회적 기구와 이론이 현실을 포착하지 못하고 겉도는 사이에 정작 사회 내의 연대를 만들어내는 감정의 공동체를 창출하고, 현안이 되고 있는 문제를 직설적으로 지목하고 대안을 요구하는 저항을 조직하는 작업은 전혀 사회적 분석의 대상으로 떠오르지도 않았던 ‘부족들’의 결속과 각축을 통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대목이다. 그런 ‘부족들’은 자신들의 강령이나 지도자를 전형적으로 갖고 있지도 않고, 즉흥적이거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더라는 당혹스런 관찰이다. 나는 이런 주장이 말이 되는지, 말이 된다면 그래서 나와 내 주변을 어떻게 달리 보게 될 것인지,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지, 혹은 어쩌라는 말인지를 자문자답 해보고 싶었다.
이런 맥락에서 앞으로 나의 글쓰기는 내가 어떤 부족에 속하는 것인지, 나는 그들을 어떻게 알아볼 것이며, 그들은 나를 어떻게 만나게 될 것인지 물어보는 작업이 된다. 그 작업은 어떻게 진행될까? 논리정연한 질의응답 시나리오를 따라 가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의 의견과 취향에 대해 물어보고 그 대답을 존중하고 음미할 것이며, 희노애락의 감정을 마구 드러내어도 괜찮다고 말할 것이고, 좌든 우든 보수든 진보든 교조적 주장에는 삐딱하게 토를 달아볼 것이며, 많이 먹고 마시고 즐겁게 노는 일의 중요성을 옹호할 것이다. 욕망의 절제 이상으로 욕망의 분출을 고민할 것이며, 예술가의 감성과 격투가의 육체와 신앙인의 영혼을 혹은 신앙인의 육체와 예술가의 영혼과 격투가의 감성을 두고 이야기를 해볼 수도 있다.
나의 이름 해리(Harry)는 서양의 흔한 남자 이름이다. 연배가 있는 이라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한 영화 <더티 해리(1971)>를 떠올릴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에서 빌리 크리스탈이 연기한 그 아저씨를 연상할 수도 있다. <해리 포터>를 읽은 세대는 또 다른 해리의 얼굴을 그릴 것이다. 지금의 대중문화 씬에서는 가수 해리 스타일스나 왕족 신분을 포기한 영국의 왕자 해리가 가장 먼저 떠오를 ‘해리’일 지도 모르겠다. 누구라도 상관없고, 누구일 수도 있기에, 어떤 이야기든 풀어내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나는 이 논의에 젠더-프리 전략을 적용할만한 준비가 되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그런 차원에서 ‘아저씨’를 자임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선택이겠으나, 나는 일단 주어진 조건에서 출발해서 어디까지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는지 노력해 보려고 한다.) 나는 아직 ‘해리’를 어떤 특정한 캐릭터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제 막 그에게 대단치 않은 이름을 부여했을 뿐이다. 그와 더불어 여행을 시작하는 일에 독자들 못지 않게 나도 기대감을 갖고 있다. 이 여행의 끝에 나는 내가 어떤 의미로 ‘부족주의자’인지를 좀 더 명료하게 깨우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환영한다, 해리의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 a mode of life)를 시작한다. (끝)